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트 코베인 (문단 편집) === 너바나 결성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irvana1987.jpg|width=100%]]}}} || ||<#000> '''{{{#fcb81e 1987년의 너바나}}}''' || 결국, 커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왜냐면 공부를 너무나 싫어하고 하지 않다보니 성적이 나빠 졸업할 수 있는 학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떠나[* 커트의 어머니는 커트가 학교를 그만두자 직장을 구하든가 아니면 집을 나가라며 커트를 구박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 그러다 결국, 커트가 더는 어머니와 살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간 것이다. 딸 프란시스를 가졌을 때도 커트는 어머니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다만 커트의 어머니는 나중에 아들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되고는 아들의 장례식으로 찾아와 크게 슬퍼했고 지금도 손녀 프란시스를 매우 아낀다.] 여자친구 트레이시 머랜더와 동거하게 되었다. 그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청소부 같은 잡일을 하고 지내다가[* 이때 워낙 가난하게 살았는데 커트의 고백으로는 여자친구 트레이시가 일하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들을 훔쳐와서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펑크 록]]을 알게 되었다. 이후 커트는 일을 그만두고 [[일렉트릭 기타]] 연습에 빠져들었고 훗날 얼터너티브 록밴드 Melvins로 음악사에 족적을 남기는 다른 멤버들과 fecal matter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1년 남짓 활동한다. 이 때 녹음한 Illiteracy Will Prevail라는 이름의 데모 테이프는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풀버젼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녹음 상태가 매우 조악하고 가창력이나 연주도 아직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하여 그다지 들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 커트 코베인의 초기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뿐.] [[1987년]], 마침내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너바나(밴드)|너바나]]를 결성했고 2년 후인 [[1989년]] [[6월 15일]]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커트는 만성적인 위염과 복통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지도 못해 항상 소식을 할수밖에 없었고 마른 체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커트는 자신의 마른 체격을 싫어했고 콤플렉스로 여겼기에 주로 큰 사이즈의 옷을 입고 다녔다.] 이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기관지염]]과 [[척추측만증]]을[* 이는 커트가 무거운 기타를 항상 메고 있었기에 발생했다. 깁슨사의 SG 처럼 가벼운 기타도 있지만, 레스폴 처럼 말도 안되게 무거운 기타도 있다. 커트 코베인이 사용하던 펜더사의 스트라토케스터나 재규어의 경우 3킬로 정도하는 물건이다. 군필자들이라면 K-2 소총과 비슷한 무게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른 체구로 늘 무거운 기타를 메고 1~2시간짜리 공연을 거의 쉬지도 못하고 소화를 하면 몸이 남아 돌리가 없다. 록/메탈씬 뮤지션들이 괜히 우락부락한 체격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김태원의 경우 저질 체력으로 인해 무거운 기타를 공연 때 장시간 메고 다니기 힘들어서 ESP 커스텀 기타를 주문할 때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비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커트가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은 뒤, 커트는 주위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커트는 인터뷰에서 복통이 너무나도 고통스럽지만 없어지는 것은 두렵다고 했다. 그의 고통이 그가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큰 영감이었기 때문.] 게다가 그는 주변의 평가에 심하게 휘둘렸기 때문에 데뷔 싱글 [[Love Buzz]]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커트 코베인은 결국, [[1987년]]부터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 6월 15일]]에 발매한 너바나의 1집 앨범 [[Bleach]]는 언더에서 발매한 앨범치고는 차트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들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이미 시애틀을 넘어선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 [[6월]]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이 탈퇴하였고 밴드는 [[데이브 그롤]]을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국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과 메이저 데뷔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